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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된 장소, 강제된 관계를 질문하는 탈시설 운동
 (1.♡.163.86) 19-07-12 03:44 230회 0건
강제된 장소, 강제된 관계를 질문하는 탈시설 운동
[교차적 관점으로 시설화 비판하기] ⑫
등록일 [ 2019년07월11일 17시57분 ]

/기획의도/
 
장애여성공감은 [IL과 젠더 포럼]을 통해서 장애인 탈시설 운동의 문제의식을 확장하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삶을 통해 증명하듯이,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지난한 ‘과정’을 의미합니다. 단지 삶의 장소를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시설에 수용된 역사를 재해석하고, 지역사회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관계 맺기를 해나가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인 조건과 권력의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시설을 폐쇄해서 더이상 시설에 갈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또한 이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은 등록된 장애인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부랑인, 홈리스를 비롯해서 정신병원에서 심지어 지역사회와 집에서 사실상 감금된 채로 살아온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함께 드러내고 변화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에 대한 억압뿐만 아니라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에 대한 억압과 정상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동시에 필요하며 다양한 해방의 관점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장애여성공감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설화에 저항하는 동료들을 만들고, 누구도 시설에 수용되지 않는 사회를 그려보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방식과 집단(부랑인, 정신장애인, 소위 요보호 아동, 여성, 성폭력 피해자, 난민,  HIV 감염인 등)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시설화의 양상들을 살펴보고, 이와 관련된 문제점과 대안을 찾아 나가는 시도를 해보고자 합니다.
 
/연재순서/
 
①시설화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며 : 나영정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②사회복지체계에서 탈시설 운동의 의미: 김지혜(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
③탈시설 운동의 확장: 조미경(장애여성공감)
④홈리스 시설: 김윤영(빈곤사회연대)
⑤한부모 시설: 오진방(한국한부모연합)
⑥입양/미혼모 시설: 김호수(뉴욕시립대학교 사회학과)
⑦정신병원/요양시설: 노다혜(장애여성공감)
⑧성폭력 피해자 쉼터: 여름(장애여성공감)
⑨난민 시설: 고은지(난민인권센터)
⑩(탈가정) 청소년 시설: 변미혜(함께걷는아이들)
⑪요양병원: 권미란(에이즈환자 건강권 보장과 국립요양병원 마련을 위한 대책위원회)
⑫가족: 김순남(가족구성권연구소)
⑬성매매피해자 자활시설: 김주희(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


*필자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시설은 어디인가?

 

시설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로서의 분리나 유예된 시간, 폐쇄된 삶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인간의 상이 무엇인지를 호명하는 메커니즘이다. 장애인 시설, 미혼모 시설, 요보호시설 등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함께 공존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 누구인가를 적극적으로 호명하는 기제로 작동해 왔고, 어떤 이가 시설에서 고립되는 원인을 존재에 내재한 문제로 만들어왔다.

 

국가와 사회가 시설에서의 삶을 정당화하고, 시설로 보내질 인구집단을 분류하는 근거는 ‘가족을 만들 수 없는, 만들어서도 안 되는 혹은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존재들’과 분리되지 않는다. 많은 시설들이 가족에게 짐이 되는 장애인, 가정환경의 문제를 가진 미혼모, 그리고 가장이 부재한 요보호 여성, 길거리를 배회하는 고아들을 선별해왔다. 시설화 정책의 대상은 ‘이상적인 가정환경’으로부터 일탈된 존재들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상적인 가정환경은 신체정상주의, 능력주의, 빈곤하지 않은 이성애가족질서를 공고히 하는 과정이며, 그것의 외곽에 선 존재들은 가족질서 근간을 흔드는 존재들로 배치해 왔다. 김호수는 미혼모가 아이를 출산했을 때 입양을 권유하는 근거로 결혼한 가정에서 아이가 자라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논리뿐만 아니라 순응적인 존재로 통치화 하는 전략과 맞물려 있음을 언급한다.1)  미혼모시설에서 IO 지수, 교육정보, 가정환경, 성장배경, 성경험 등을 수집화 하고 분류하는 과정은 정확히 이 사회에서 이상적인 삶, 관계가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맥락과 교차된다.2) 즉, 시설화는 시설 내부에서 작동하는 규율체계만이 아니라, 사회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인간됨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쇠창살이 있고 안에는 사람, 이불, 책 등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인다. 사진 픽사베이
 

시설화가 시민으로서의 온전한 권리를 박탈당하는 많은 존재들의 삶과 연결될 때, 시설 안과 밖의 경계는 모호하며, 특히 시설화의 메커니즘에 동원되어온 이상적인 가족의 상 또한 은폐된 삶의 자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국가가 ‘가정보호’라는 이름으로 가정폭력 가해자를 집으로 돌려보낼 때, 많은 피해 여성에게 집은 고립되고, 차별적인 삶을 강제하는 시설과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을까? 또한, 유방암 여성 환자 10명 중 1.5명(15.3%)이 다른 여성의 이혼율과 다르게 3배가 높은 비율로 이혼을 경험할 때3), 여성을 여성으로서의 ‘기능’이나 역할로 한정하는 가족관계에서 여성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진 존재로 간주할 수 있는가? 시설이 은폐된, 감금된 자리로 상상된다면, 가족은 “사생활권과 자율성이라는 관념으로 만들어진 감옥”4)일 수 있다는 지적은 가족관계 내에서 여성뿐만 아니라 소수자의 삶을 반영한다.

 

인간을 인간의 삶으로 환대하지 않는 그곳, 존재를 사회적 시민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기능으로 소환하는 그곳은 삶의 존엄이 단절되는 시설과 분리되지 않으며, 이때 가족과 시설의 경계는 불분명해진다. 김현경은 “사회 안에 자리/장소가 없는 사람,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서줄 제삼자를 갖지 못했기에, 사적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자리/장소를 지킬 수 없다”5)라고 한다. 즉, 사적인 삶은 특정한 장소에 정박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삶의 장소와 분리되지 않으며, 관계 속에서 안정감, 소속감 또한 사회적으로 어떠한 관계성이 이상적인가에 따라서 의미는 유동적으로 구성된다. 시설의 의미가 시설이라는 공간을 넘어서 펼쳐지는 “‘다른 곳’과의 관계와 연계를 통해서 구성”될 때6), 가족의 의미 또한 가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 국가정책 등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많은 시설의 설립 목적이 ‘건전한 사회참여 유도’, ‘자활능력회복’이며, 무수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교정’하고 ‘치료’를 통한 인간사회화의 회복을 근간으로 할 때, 복귀할 사회는 어떤 곳이며, 복귀할 사회에서 상상하는 사회화된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 인간의 삶을 정상화하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인간을 구분하는 위계에 대한 저항과 균열을 통해서 사회를 재구성하지 않는 이상 사회복귀 논리는 시설화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하기에 사회복귀라는 목표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또한 이성애정상신체중심주의, 생산성에 따라 국가 미래에 도움이 되는 출산을 담당하고 문제적인 존재들을 ‘지도’하는 단위로서의 가족이 공고할 때, 시설과 시설이 아닌 곳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가족 자체도 도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 강제된 장소, 강제된 관계를 질문하는 탈시설 운동

 

시설에만 머물 수 있는 존재가 권리를 가질 수 없듯이, 가족에게만 머무를 수 있는 존재 또한 권리를 가질 수 없음은 자명하다. 내가 어떠한 삶을 살고자 하는지 나에게 묻기 전에 국가와 가족이 나의 결정을 대리하는 그곳에서 폭력과 차별은 은폐되고, 보호라는 논리 아래 강제된 장소, 강제된 관계를 정당화하는 토대가 된다. 장애여성공감이 지원했던 162건의 상담 내용 중에서 가족관계에서 독립생활에 대한 상담 비율(19%)이 높은 것은 시설과 시설이 아닌 곳의 명확한 구분이 아니라 통제 가능한 몸으로 환언되는 곳이 차별이 작동하는 장소임을 보여준다7)
 

“하루에 차비가 2,400원 들어요. 그런데 엄마는 만 원을 줘요. 아무리 달라고 해도 대꾸도 없어요. 월급이요? 통장을 엄마가 관리해서 잘 모르겠어요.”
(엄마가 화가 나면) 너 그러면 시설가, 그렇게 말해요. 무서워요 그러면. 거기 가면 이렇게 할 수도 없고, 맨날 뭐라고 한다고 해서 무서워요
8)


장애여성은 고정화된 정체성의 범주로 구분된 존재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통제가능한 몸으로 만들어지는 과정과 분리되지 않으며, 그러한 존재-되기의 실천 속에서 스스로 고립된 존재, 권리가 박탈되는 존재로서의 삶을 수용하게 하는 기제와 연결된다. 무엇보다, 이렇듯 통제가능한 몸으로 변화되는 방식은 결국 국가 사회가 장애여성의 삶의 자리를 할당하는 방식이며, 그것은 보편적인 복지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삶이 아니라, 비생산적인 몸, 국가 사회에 짐이 되는 몸으로 규정되는 방식과  교차되며, 가족 내부에서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기제로 작동한다.

 

시설이냐, 원가족이냐라는 두 갈래 길 앞에 선 존재에게 ‘시설로 보낸다’라는 말의 공포는 단순히 위협 이상이며, 선택 불가능성의 상황을 반영한다. 불안전한 시민권을 가진 결혼이주여성들의 경우에도 차별의 순간이나 가족관계에서 발언권을 가지고자 할 때, ‘본국으로 돌려보내겠다’라는 말이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취약한 이주자의 삶의 위치성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사용됨을 보여준다.9) 불안전한 삶의 핵심은 삶의 장소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며, 강제된 관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삶에로의 이동이 봉쇄되는 것이다. 강제된 장소, 강제된 관계는 가정폭력의 상황에서도 가정보호 조항이라는 미명아래 집을 떠나고자 하는 여성들을 가정의 자리에 머물게 하는데, 가정폭력은 국가에 의해서 여성들이 집을 떠나는 것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그곳에서 발생한다. 또한, 임신중지 선택에서 배우자 동의가 존재하는 것은 재생산권리의 침해뿐만 아니라 남성의 보호 아래 놓인 관계를 정당화하는 것이며, 배우자 동의라는 의미 또한 이성애 결혼관계를 당연한 생애 과정으로 배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강제된 장소, 관계 속에서 진정 내가 원하는 가족을 만들고, 선택할 수 있는 가족구성권의 권리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 또한 종속된 관계의 자리를 강제당하는 존재들에게 중요한 질문일 수밖에 없다.

 

보호의 자리는 삶의 결정권을 가질 수 없는 존재, 유예된 존재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며, 그것은 청소년의 삶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한국사회에서 청소년 부모(만 24세 이하)에 의한 출생률이 2018년도 전체 출생아 수의 16명 중의 1명으로 추정되지만, 청소년을 ‘행위무능력자’로 법률화하는 사회에서, 주거계약의 주체는 부모로 한정하고 있다.10)


부모를 떠나서, 혹은 폭력으로 또 다른 삶을 만들어가는 청소년에게 부모를 소환하는 이 사회의 보호체계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수없이 이어진다. 또한, 많은 청소년비혼여성들이 동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부모가족지원법 지원을 받기 위해서 동거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관계성의 박탈은11) 원가족의 동의와 국가사회의 보호라는 미명아래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침해되는 상황을 야기하며, 빈곤한 삶으로, 불안전한 관계성으로 내몰리는 무수한 존재들의 삶과 연결된다.

 

이렇듯 가족의 동의가 강제되는 삶은 국가가 개인으로서의 시민권을 유예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기제이며, 가족의 얼굴을 띤 강제적 친밀함은 장애인들이 시설 종사자들을 엄마, 아빠라고 호칭하게 하는 구조 속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12) 인권에 기반한 삶이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것, 그리고 인권에 기반한 삶의 자립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회의 태도가 순환적으로 사회적인 고립, 가족 내의 고립된 삶을 정당화해 왔다. 이 사회에서 ‘보호’받는 집단으로 규정되는 존재들은 이미 ‘문제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며, 사회적 소수자들이 수행하는 삶의 재생산을 위한 상호돌봄과 관계성을 만들어 가는 무수한 실천들은 사회의 부수적인, 가족관계에서 주변적인 가치로 위치 지어지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조로 이어진다.

 

탈시설 운동의 의미를 조미경은 “장애인이 시설에 수용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것과, 가치 절하를 당한 개인이나 집단이 생애주기별로 다양한 경험을 선택할 자유를 가져야”13)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탈시설운동은 생애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선택할 수 없고, 다양한 삶을 꿈꿀 수 있는 권리를 침해당하면서 통제가능한 몸으로 소환하는 많은 이들의 삶과 연결된다. 탈시설 운동이 시설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니라 주류적으로 상상되어 온 가치의 변형일 때, 강제된 장소, 강제된 관계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삶의 영역과 교차한다.

 

벽돌 건물 가운데에 창문이 있으며, 창문 방충망 가운데 일부가 뜯어져 있다. 사진 픽사베이
 

- 정주할 권리, 이동할 권리, 관계를 맺을 권리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꿈을 꾸지 못하게 하는 것, 관계 맺지 못하게 하는 것. 에로틱과 무관한 존재이어야 하는 것이 지금까지 국가가 채택한 시설정책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국가가 인간됨을 무력화하는 최고의 전략이었지만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내가 어떻게 살고자 하는가? 내가 누구랑 어떠한 방식으로 삶을 욕망하는가를 상상하지 못하게 하는 전략이었다.

 

나영정은 보건복지부가 만든 ‘거주시설 인권보장 가이드라인’에는 성생활 보장권과 가족생활 보장권이 포함되어 있지만, 건전한 성적 주체가 되기 위한 ‘교육’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현실과 달리, 실제 가족생활을 영위한 사례는 어디에도 전해진 바가 없다고 이야기한다.14) 관계를 맺을 권리를 침해당한 많은 존재들에게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원가족과 다른 가족을 만드는 의미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만들면 안 되는 사람들로서 낙인화 하면서 시민의 삶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강제해 온 사회에 개입하는 것이다. 은폐된 친밀성과 에로틱의 욕구를 드러내는 것, 정주할 주거를 요청하는 것, 폭력과 차별적 관계를 떠날 자유를 외치는 것은 국가가 인정하고 승인하는 이상적인 가족모델의 억압성과 가족을 단위로 개인의 시민권을 침해해 온 제도적 가족주의의 균열과 연결된다.15)


탈시설을 하면서 ‘우리 같이 살래요’라는 선택지를 가질 때, 그리고 그 선택지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친밀한 타자를 내 삶의 자리에 내가 호명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자유의 출발로써 이야기한다.16) 정주할 수 있는 삶으로 산다는 것, 이동할 삶의 자리가 가능한 것, 관계적 존재로 사는 삶을 선언하는 것은 나를 쓸모없게 만들고 ‘무력한 존재’이자 ‘불구화된 존재’로 만들어 내는 무수한 권력으로부터 나의 삶을 마주하는 여정이며, 낙인화된 많은 존재들의 삶의 변화를 추동하는 과정이다.

 

한국에서 시설의 역사와 함께한 장애여성공감 회원인 영진이 시설에서의 삶을 떠나면서 ‘내가 나를 책임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강제된 장소, 강제된 관계를 떠나면서 삶을 찾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여정과 만날 것이다. “내 친구를, 내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것. 나를 영원히 기억해줄 사람, 나를 묻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17)는 영진의 바람들은 단독자 개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의존되고, 상호돌봄을 추구해 온 ‘이상한 몸’들의 역사와, 그 삶의 계보를 당당히 이어가고자 하는 소망일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는 공적인 공간에서 “성스러운 신체규범”을 갖지 못한 자,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간주되어 온 여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들이 공간을 점유하고, 공간을 교란할 때 새로운 가치들을 만들어 왔다.18) 탈시설운동은 시설을 떠나는 문제가 아니라, 시설에서의 삶이 어떠했고, 고립된 삶을 강제한 주체가 누구이며, 왜 그렇게만 살도록 이 사회가 ‘내버려 두었는가’에 대해 사회와 국가에 대한 물음이며, 시설과 시설이 아닌 곳을 그토록 분리해 온 폭력적인 가치에 개입하는 과정일 것이다.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존재로, 가족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삶의 결정권이 아니라 의존된 삶으로 환언되어 온 삶들, ‘아무도 내개 꿈을 묻지’19) 않았던 ‘불구화된 존재’로 배치해 온 소수자들의 탈시설운동은 ‘정상적인’ 인간의 가치와 관계적 삶의 규범을 ‘퀴어링’하는 저항적인 실천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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