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과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최근 ‘제9회 일상 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스토리텔링 공모전은 장애인과 관련된 일상 속 이야기들을 통해 장애인식개선을 도모하고자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올해에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과 함께 진행, 기존 일상부문에 고용부문이 추가됐다.

공모전 결과 이음미 씨의 ‘빙산의 일각’ 일상부문 대상, 박수현 씨의 ‘우리의 삶이 해석되는 순간’ 고용부문 대상 등 총 30개 입상작을 선정해 시상했다.

입상작 중 대상 2편, 최우수상 4편, 우수상 9편 등 15편을 소개한다. 아홉 번째는 일상부문 우수상 수상작인 김지우의 ‘휠체어로 떠난 유럽 여행 중 만난 소중한 문장, “That’s can’t be happened”(그건 있을 수 없어요)’이다.

휠체어로 떠난 유럽 여행 중 만난 소중한 문장,

“That’s can’t be happened”(그건 있을 수 없어요)

김지우

“2023 제네바 국제인권기구 탐방 프로그램”, 평소 잘 읽지 않던 학교 메일함에서 문득 눈에 띄는 메일을 발견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10일 동안 머물며 유엔 등 인권기구를 탐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신청해 볼까? 유럽에 가는 김에 앞뒤로 여행도 하고 말이야.’ 그런 생각이 들어 호기롭게 지원서를 작성했다. 비록 나는 수련회, MT 등에서 종종 뒤로 물러나거나 아예 결석하는 휠체어 탄 학생이었지만, 이번 연수는 왠지 가야 할 것 같았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휠체어를 탄 학생을 선뜻 지구 반대편으로 인솔하려 할까 하는 고민이 들었으나, 심사위원들은 내 장애는 탐방 지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듯이, 면접 때 장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이후 합격 안내를 전했다. 이젠 정말 가는 거다. 스위스 제네바로 가게 되었으니, 연수 앞뒤로 일정을 붙여 프랑스와 독일을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유럽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떠올린 고민은 다름 아닌 ‘배터리’였다. 여권도 아니고, 시차도 아니고, 여행 계획도 아니고 갑자기 배터리라니. 휠체어와 함께하는 삶은 그런 것이다. 용량이 큰 배터리를 가져가자니 기내 수하물 제한이 있고, 작은 배터리를 가져가자니 유럽의 한복판에서 외출 4시간 만에 숙소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운 좋게 연이 닿아 배터리 용량 제한이 없이 가져갈 수 있는 전동 휠체어를 빌릴 수 있었다. 늘 가벼운 수전동 휠체어만 탔던 탓에 200kg 거대한 휠체어를 운전한다는 게 부담은 되었지만, 험난한 유럽의 돌바닥을 견디기 위해서는 앞바퀴가 커다란 전동 휠체어가 나을 것도 같았다. 배터리 문제가 해결되니 여행이 점점 더 실감 나기 시작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유럽이었다. 14시간을 날아가야 가닿을 수 있는 유럽. 낮과 밤이 정반대인 곳에, 가족 없이 가는 것은 완전히 처음이었다.

무심한 다정함을 느끼다

출국이 거의 한 달 전 확정된 것이라 계획을 짤 새도 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14시간을 꼬박 날아 파리로 갔다. 내리기 두 시간 전쯤에는 혈액순환이 되지 않는 다리가 퉁퉁 부어 극심한 관절통이 찾아왔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을까요? 컨디션은 어때요?” 파란 눈의 승무원이 내게 물었다. “진통제 하나 받을 수 있을까요? 좀 좋지 않네요.” 내가 답했다. 그는 종이컵에 두 알의 진통제를 가지고 와 주었다.

“어디가 아파요?”

“다리가요. 너무 오래 앉아있었나 봐요.”

승무원은 무던하게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이 좀 길죠.” 그가 덧붙였다. “길어도 너무 기네요.” 우리는 징글징글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담백함. 무심한 다정함. 여행 시작부터 찾아온 이 느낌은 유럽 여행 내내 나를 감싸게 될 것이었다.

본격적인 여행기를 시작하기 전에 고백하자면, 이 글은 아주 무사히 여행을 끝내고 온 ‘장애인의 유럽 정복기’ 같은 건 아니다. 나는 파리 한복판에서 울기도 하고, 전차에서 내리지 못하기 도 하고, 기차를 놓치기도 했다. 열차 예매에만 5시간은 족히 쓴 것 같고, 말이 안 통하는 프랑스인과 옥신각신하기도 하고, 4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여 휠체어 채로 들어 올려지기도 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내가 벌써 이 시간을 추억하는 이유는 그 모든 엉망인 순간만큼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무심한 다정함 속에서 동료 시민으로 오롯이 있을 수 있던 기억 때문이다. 내 불편이 절대로 당연한 게 아니라는, “That can’t be happened. (그건 있을 수 없어요.)” 같은 멋진 말을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파리 여행은 첫인상부터 강렬했다. 공항에서 열차를 탈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내려야 하는 역에서 갑자기 높은 두 칸의 단차가 눈앞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플랫폼이 열차보다 한참 낮아 서 생긴 일이다.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뒤 눈을 꼭 감고 후진하여 뛰어내렸다. 쾅, 쾅! 하는 큰 소리가 들렸고 몇몇은 놀랐는지 소리를 질렀다. 허리가 웅웅 울렸지만, 그보다는 “해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 입성의 순간이었다. 그 이후에도 몇 번 더 뒤로 뛰어내려야 하는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지만, 시내로 들어간 이후부터는 지하철 노선과 거의 같은 버스 노선 덕에 어려움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지하철과 기차를 이용하긴 어려웠지만 거의 모든 버스가 저상버스 이기 때문에 아무 버스나 빨리 오는 대로 타면 되었다. 유명한 관광지에서는 장애인과 노인, 어린아이 등 이동약자가 먼저 입장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두었다.

실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게에 들어설 때, 엘리베이터를 탈 때, 지하철을 탈 때, 통로에서 마주쳤을 때 많은 이들은 내가 먼저 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곤란한 상황에서는 ‘Do you need any help? (도움이 필요하신 가요?)’ 라고 물으며 다가오곤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피부에 와 닿았던 것은 함께 같은 공간에 존재하거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의 반응이었다. 나는 어리고 장애가 있는 여성이다. 특히 커다란 전동 휠체어를 탄 나를 보면 사람들은 뭔가 신기하고 새로운 걸 봤다는 듯이 눈을 떼지 못하곤 했다. 혹은 반대로 보면 안 되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어색하게 눈을 피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곳에서 역시 나는 이방인이다. 휠체어를 타고 어리고 여자면서 또한 아시아인이었다. 생경한 시선이 없냐고 하면 절대 그렇지 않지만, 내 존재는 모두에게 담백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종종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우리는 그저 싱긋 웃고 갈 길을 갔다. 그는 그저 나를 행인1로 여길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그곳에서 우리의 마주침은, 그리고 나의 존재는 어떤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늘 ‘의미 있는’ 무언가를 두 어깨에 가득 지고 사는 장애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동료 시민. 그런 단어가 생각났다. 어떻게 대할지 몰라 쩔쩔매거나, 아예 우리 사이 차이가 없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세상에 다른 세계를 가지고 이만큼의 지분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감각하지 못한 내게는 새로운 힘이 생긴 기분이었다.

기꺼이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과 담백히 웃음 짓고 사라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흘을 보냈다. 이후 스위스에서도 마찬가지인, 아니 더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트램과 버스로 주로 이동하게 되는 스위스에서는 모든 차량에 큼지막하게 유아차와 휠체어 마크가 붙어 있곤 했다. 늘 학교에서 어딘가를 갈 때면 낙오되어 혼자 쉬거나 가장 마지막에 가곤 했던 내가 모든 일정을 다른 친구들과 동일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모든 대중교통은 커다란 전동 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었고, 내가 타는 새 지연되는 버스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버스에 올라타는 다른 ‘동료 시민’들이었다. 휠체어는 기본이고, 유모차가 두세 대씩 타는 건 일상이었다. 우리는 서로 눈인사하며 조금씩 움직여 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함께 흔들리며 목적지로 향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양한 이들이 많았다. 비키니를 입은 할머니와 임산부, 유아차를 탄 아이들, 나와 같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까지, 휠체어가 편하면 누구든 편하다는 걸. 장애가 있는 동료 시민을 받아들이는 시민이라면 어린 시민과 나이 든 시민도 받아들인다는 걸 감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스위스에서 나는 유엔 본부에도 갔다가, 스위스 수도에도 갔다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인 융프라우에 오르기도 했다. 내 존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공간들에서 나는 쩔쩔맬 필요가 없었다. 늘 외출할 때 나를 괴롭혔던 고민인 ‘거기까지 어떻게 가지? 가서는 잘 들어갈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은 잊힌 지 오래였다. 가고 싶다면 갈 수 있었다. 들어가고 싶은 곳엔 들어갔다. 그게 다였다.

여행 마지막 마주친 문장이 준 깨달음

여행을 통틀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여행 마지막 날 겪은 고난이었다. 어쩐 일인지 공항역의 기차에서 내릴 때 휠체어 리프트가 오지 않았다. 5분 정도 기다린 후에야 다른 사람이 급히 휠체어 리프트를 가져다주었다. 이미 프랑스에서 지독히 경험한 일이기 때문에 내겐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나 관계자로 보이는 이는 심각하게 내 예약 번호와 이름 을 기록했다. 몇 번이고 사과하며 상황의 원인을 파악하겠다는 그에게, 나는 웃으면서 “이런 일은 늘 있을 수 있지.”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내가 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며 그렇게 말했다. “No, that can’t be happened. (아뇨, 그건 있을 수 없어요.)”

늘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며 살아온 나다. 이 건물은 낡았으니 네가 못 들어오는 것은, 다른 아이들이 많으니 너까지 챙기지 못하는 것은,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네가 조금 불편한 것은,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역시 허허 웃으며 그 시간들을 건너왔다. 그때 허허 웃지 않고, “아뇨, 그건 있을 수 없어요.” 라고 대답했으면 어땠을까. 그날 그가 말한 문장은 그저 스쳐 지나간 말이었으나, 허허 웃으며 뒤로 물러났던 모든 순간에 대한 대답같이 느껴졌다.

앞으로는 그저 웃지 말고,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부당한 상황들에 대해 “아뇨, 그건 있을 수 없어요.” 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유럽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소중한 문장 하나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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