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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장애인복지관 최종환 관장님의 오랜 사회복지 발자취
21-09-02 09:31 1,006회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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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영등포장애인복지관 관장으로 취임하신  최종환관장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복지관을 이끌며 공감시네마, 토닥토닥 템플스테이 등 다양하고 참신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계십니다 

 
영등포장애인복지관 최종환 관장님의 오랜 사회복지 발자취를 따라가 볼까요? 
불교복지는 불연이 맺어준 길…이제 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스님이셨던 조부 인연으로 만난 법화 스님 권유에 사회복지 전공 선택
타종교 텃밭인 복지관 취업 좌절 후 총무원 자원봉사자로 복지 첫 삽
개혁종단 출범 후 복지재단 설립 주도…시설수탁으로 불교복지 꽃 피워
30여년간 불교복지 외길을 걸어온 최종환 관장은 오랜시간 몸담았던 조계종사회복지재단을 떠나
2021년 1월 영등포장애인복지관장으로 부임했다. 아쉬움보다 기대감이 더 크다는 그의 복지여정은 현재진행형이다. 
 
 

최종환 영등포장애인복지관장은 30여년간 불교사회복지 한 길만을 걸었다. 사회복지라는 개념조차 정립 되지 못한 시절, 이웃종교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회복지 현장에 혈혈단신 뛰어들었다. 불교계가 사회복지에 진출할 수 있도록 토대를 닦았고, 조계종사회복지재단 설립을 주도하며 타 복지법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일궈냈다. 오늘날 불교복지가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 배경에 그가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최 관장과 불교의 인연은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스님이었던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손주를 무릎에 누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린아이에게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큰 충격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불교를 보다 깊이 마음에 품게 됐고, 할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는 문경 김용사를 더 자주 찾았다.

이 또한 운명이었다. 청담 스님의 상좌였던 법화 스님이 수행을 위해 김용사 화장암으로 내려온 것이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를 줄곧 강조한 스님으로부터 실천의 중요함을 배웠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는 그에게 평생의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됐다. 이후 대학 진학을 앞두고 사회복지학과를 권유한 스님의 조언으로 인생의 방향을 세웠다. 부친과 동생이 장애를 앓고 있었다. 누구든 소외되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에 대한 고민은 오래전부터 싹트고 있었다. 스님의 한 마디는 큰 울림이 됐다. 불교와 복지의 결합, 마음으로만 품어오던 자비실천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다.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마쳤지만 80년대 한국의 복지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세례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로 복지관 취업 면접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셨다. 대부분의 복지시설은 선교차원에서 운영 중이었기에 불자인 그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허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조계사로 향했다. 그때 담벼락에 있는 ‘불교계, 사회복지 참여 필요’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패기로 무장한 그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무작정 조계종 총무원을 찾아갔다. “불교계도 사회복지를 해야합니다!”

사회초년생은 열정이 넘쳤다. 사회부에 자원봉사자로 근무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가정탁아교사양성교육’과 ‘봉사자 양성’ 사업 카드를 꺼내들었다. 당시 맞벌이 부부가 크게 늘면서 자녀양육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불교가 복지계로 뛰어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방송출연까지 해가며 홍보활동을 했다. 비록 무급이었지만 불교복지에 전념할 수 있던 생활에 가슴 두근거렸다.

그가 흘린 구슬땀을 주변 사람들도 모를 리 없었다. 총무원 근무 1년 6개월 만에 사회계장으로 정식 채용됐다. 이후 불교계 장애인의 날 행사, 시낭송회, 외국인노동자 자선 행사 개최 등 사회적 약자로 지칭되는 이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며 불교복지 외연을 넓히는 데 힘썼다.

시절인연도 이어졌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주택 200만호 정책에 따라 저소득층 밀집지역에 복지관을 건립하고 있었고, 민간단체에 시설을 위탁했다. 부처님 자비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직접 위탁사업에 뛰어들었다. 의지를 불태웠으나 경험이 없었다. 좀처럼 길이 보이지 않아 좌절하던 순간 뜻밖의 손길들이 그를 붙잡았다. 기독교 시설 곳곳에 있던 불자들이 지원사격에 나선 것이다. 곳곳에 숨은 노력이 더해져 소규모 시설들을 위탁할 수 있었다.

현장 종사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아쉬움과 울분의 소리도 봇물 터지듯 그에게 전해졌다. 종단 관계자로서 종사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듣고 있자니 죄인 된 심정이었다. 불교 복지 관련 종사자들을 하나로 모으고 사회복지 관련 업무를 총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재단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94년 개혁종단 출범 후 “전문적으로 사회복지를 실천할 수 있는 복지재단을 설립해야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11월, 월주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당선되면서 전폭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재단설립이 추진됐다. 4개월의 준비 끝에 1995년 사회복지법인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의 본격적인 출항을 알렸다.

사회부 소속이었던 그는 스님들과 함께 교구본사의 관심을 유도하고 교계에 맞는 복지 시스템 구축을 위해 100일 조사에 착수했다. 운영지원사찰제도를 도입하면서 각 사찰의 특성을 반영한 관리체계도 세워나갔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에는 봉사단을 조직해 파견했고, 재단 설립 이전부터 추진했던 봉사자 양성을 이어받아 재단 산하에 자원봉사센터도 설치했다. 극심한 식량난에 처했던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불교도연맹과 접촉해 식량을 전달하기도 했다. 숨 쉴 틈 없이 돌아가는 하루하루였다.

일을 하면서도 마음 한켠에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갈수록 ‘복지를 하고 싶어서 종단에 들어온 건데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당시 재단은 사회부장 스님이 상임이사를 겸직했기에 업무에 관여는 하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실천에는 한계가 있었다. 월주 스님을 찾아 복지재단으로 보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몇 번의 만류에도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1998년 1월1일 조계종사회복지재단으로 출근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복지재단이 복지계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은 미미했다. 재단 설립 이전부터 시설위탁을 조금씩 맡아오고 있었지만 부족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만 했다. 직접 현장을 뛰고, 알맞은 사업이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경험이 자산이었다. 위탁을 위해 준비한 서류만 책 3권 분량, 그동안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교계 최초로 강북장애인복지관을 수탁했다.

지금까지 최 관장의 손을 거쳐 위탁받은 시설은 전국에 수백여 개. 어느 것 하나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유독 가슴 뿌듯한 건 서울노인복지센터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종로에 노인복지시설이 건립될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탑골공원에서 줄 서서 무료급식을 받는 노인들의 모습이 국가 이미지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1998년부터 탑골공원 무료급식을 진행해온 조계종사회복지재단에 당연히 우선권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웃종교에서도 앞다퉈 도전장을 내밀면서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다. 당시 실무진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계종사회복지재단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조계종 총본산인 조계사, 원각사가 있던 탑골공원 등 불교 유적 인근에 자리한 센터 입지와 그간 탑골공원에서 진행한 무료급식사업 등을 강조했다.

“아무 기여도 없던 법인들이 운영을 맡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담당자에게 항의했죠. 불교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목소리 좀 높였습니다.”

센터는 극적으로 재단의 품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한 숨 돌리기도 전에 “10일안에 개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황스러웠지만 차근차근 준비에 들어갔다. 운영지원사찰을 조계사로 정하고, 조계사 신도조직을 봉사인력으로 투입했다.  재단 산하 복지관에도 복지사 파견을 요청했다. 불가능할 거란 모든 이들의 우려를 뒤로한 채 성공적으로 문을 열었다. 이후 재단은 종로노인복지관, 광진노인복지관 등 지역 복지 선도 시설들을 줄줄이 위탁받기 시작했다. 시설위탁에 공을 들인지 10여년 만의 일이었다.

최종환 관장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재난상황이 발생하면 직접 현지로 달려가 나눔의 손길을 전했다.최종환 관장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재난상황이 발생하면 직접 현지로 달려가 나눔의 손길을 전했다.

재단을 설립하고 내실을 닦아오면서 해외로도 눈을 돌렸다. 국경을 넘어선 자비의 울타리를 만들고 싶었다. 태안기름유출사고, 세월호 참사, 우면산 산사태 등 국내 문제는 물론 스리랑카, 파키스탄 지진, 아이티 대지진 등 이웃 국가의 재난상황에도 긴급구호단을 파견하며 지원에 앞장섰다. 여건상 현장 파견이 어려울 때는 피해 지역에 대한 현황 파악과 현지조사에 관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가 밑거름을 뿌린 조계종긴급구호단은 차츰 단단히 뿌리를 내리며 언제 어디든 달려 나가 구호활동을 펼칠 수 있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불교복지의 사상적 토대 또한 든든히 다지기 위해 불교복지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지도 발간했다. 연구소에서는 불교복지의 성장과 변화 현황 파악을 위해 4~5년 단위로 전수조사를 시행했다.

종로구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으로도 근무하면서 다문화와 날로 심각해지는 저출산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불교적 입장에서 문제를 연구했으며 템플스테이, 가족상담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에도 힘을 보탰다. 이렇듯 지속적인 관심과 목소리를 낸 그는 2015년 청와대에서 열린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전체회의에 민간을 대표해 참여했으며, 여성가족부로부터 가정의 달 유공포상 대통령 표창도 수상했다.

인생사가 늘 그렇듯 그가 지나온 길엔 고달픈 기억들도 아로새겨있다. 종종 재판에 서기도 했으며, 시설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로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고개숙여야 할 때도 있었고 침묵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처음 발 내딛었을 때 가슴 가득 채웠던 원력들은 다 소진되어 재만 남은 것 같았다. 그래도 시간은 쉼없이 지나갔다. 

떠나간 건 시간만이 아니었다. 2018년 겨울, 정신적 의지처였던 아버지가 세연을 접었다. 업무에 떠밀려 부친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재단의 회계를 둘러싼 횡령 문제가 불거졌다. 재단의 규모가 커지며 눈과 손이 닿기 어려운 영역들이 점차 늘어났고 결국 문제가 터져버린 것이다. 자신의 한계인 것 같았다. 거듭 퇴직의사를 밝혔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습니다. 텅빈 느낌이랄까요.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부처님과 많은 스님들의 격려였습니다. 스님들께서는 ‘개인이 중요하냐, 불교복지가 중요하냐’며 저를 붙잡으셨죠. 이때 나눈 대화와 가르침들은 제가 다시 뛸 수 있게 만든 힘이 됐습니다.”

2021년 1월 영등포장애인복지관 관장으로 취임한 그는 오랜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복지관을 이끌며 공감시네마, 토닥토닥 템플스테이 등 다양하고 참신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2021년 영등포장애인복지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손때 묻은 보금자리를 떠나는 아쉬움도 컸지만 새로운 출발에 대한 기대에 또 다시 가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불교복지에 심취해 살아온 30여년. 그는 다 태워버렸던 것 같은 원력의 불씨를 옮겨 새로운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다. “지금껏 그랬듯 스님들을 도와 불교복지를 위한 삶을 계속하고 싶다”는 그의 여정은 오늘도 진행형이다.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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